오랫동안 공판을 거듭하여 오던 조선정판사 사건의 통화위조 동 행사(同 行使) 피의사건은 1946년 10월 22일에 결심(結審)되고 이어서 담당 검사인 조재천(曺在千) 검사는 장시간에 걸쳐 상세한 논고를 하였는데 골자는 다음과 같다.제1. 사실 및 증거론(1) 예심청구를 피하고 싶은 이상 여차 복잡하고 중대한 사건은 송국(送局)되기 전부터 검사가 경찰서에 출장하여 병행 조사하는 수밖에 방도가 없고 또 그것이 비교적 가장 타당하다.(2) 경찰에서 60일 구속한 것은 군정하 이원적 법제하에서는 위법이 아니다.(3) 경찰의 고문(拷問)에
# 위폐사건 관련 이관술의 제1회 공판정판사 위조지폐사건에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는 혐의로 기소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李觀述)에 대한 제1회 공판은 10월 17일 오전 10시에 서울지방법원 4호 법정에서 조재천 검사 입회, 양원일 재판장 주심으로 개정되었다. 방청석에는 불과 십여 명이 앉아 있을 따름. 쓸쓸한 가운데 검사의 기소이유 진술이 있고 나서 박낙종(朴洛鍾) 외 8명과 병합심리를 요구하였으나 재판장은 기소가 별개로 된 것과 재판소로서 분리 심리하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병합심리를 용허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다
# 제16회 공판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제16회 공판은 1946년 9월 20일 오전 10시부터 개정되어 강중인(姜仲仁) 변호사 정직 처분에 대한 상고 문제로 강(姜) 변호사와 재판장과의 문답이 있은 후 조재천(曺在千) 검사로부터 김점석(金占碩) 검사 증인 신청을 취소하고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재정상태는 중앙간부만이 알 뿐 그 외 당원은 전혀 알 수 없다는 조공 탈당파의 한 사람인 강진(姜進)의 논문이 실려 있는 조선일보를 증거로서 제출하였다.이어서 증인으로 출동한 윤경옥(尹璟玉)에 대하여 증인 심문이 있었는데, “본정서(本町署)에
# 제14회 공판제14회 공판은 1946년 9월 17일 오전 10시부터 양원일 재판장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심리로 들어가기 전에 피고 송언필은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비공식으로 변호사단을 향하여 “미군정이 애써 고문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2개월에 걸쳐 고문을 받고 끝내 허위자백을 하고 넘어왔다는 것은 이땅 역사 위에 큰 오점을 던지는 것이니 이에 대하여 선처하여 달라는 진정서 혹은 탄원서를 하지 장군과 러취 장관에게 보내도록 해 주기 바란다.”고 부탁을 하자 신중히 고려한 뒤에 가부간 알려 주겠다고 변호인 측이 대
# 제12회 공판제12회 공판은 9월 13일 오전 10시부터 개정되었다. 피고에 대한 사실심리는 지난번 11회 공판으로 일단 마치고 증거제출로 들어가서 조(曺) 검사로부터 이 사건은 경찰서 검사국에서만 취조한 것이 아니고 CIC와 군정청경무부에서도 취조하였으므로 그 관계자를 증인으로 부르는 외 두 가지의 증거제출 명령의 제시가 있은 후 변호사의 전체 의견으로서 강중인(姜仲仁) 변호사로부터 십여 종목에 달하는 전체 증거에 관한 제시와 아울러 증인 신청이 있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본 사건 취조당시 본정서(本町署)에서 이시영 양미생(
# 정판사위폐사건 제10회 공판제10회 공판은 9월 6일 오전 10시부터 개정하여 피고 신광범(辛光範)에 대한 사실심리가 시작되었는데 재판장의 질문이 사건의 핵심점에 이르자 피고는 전면적으로 사실을 부인하고 또 재판장은 앞뒤에 쌓여 있는 증거물을 일일이 제시하며 혹은 위폐제조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인심문조서를 낭독하며 범죄사실을 추궁하는 등 이날 공판도 역시 피고의 일관한 사실부인으로 끝을 마치고 오후 2시에 일단 폐정하였다.(동아일보 1946년 9월 7일)# 제11회 공판제11회 공판은 9월 9일 오전 10시부터 양원일(梁元一) 재
# 제8회 공판정판사위폐사건 제8회 공판은 9월 3일 오전 9시부터 양원일(梁元一) 재판장 주심아래 개정되었다. 개정 벽두 피고 박낙종(朴洛鍾)으로부터 조재천(曺在千) 김홍섭(金洪燮) 두 검사에게 1시간에 걸쳐 본정서(本町署) 지하실에서 고문받은 정경을 진술하고 ‘이 사건은 사실무근으로 억울하니 깊이 생각하여 대국적으로 처리하되 특히 공소권(公訴權)을 취하하기를 눈물을 흘려가며 최후로 탄원하는 바이다. 조(曺) 검사께서 우리가 고문받은 것을 알지 못했다면 몰라도 뺨 두 개 때린 것 이외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며 위
# 제4회 공판피고 회의 문제와 피고의 재판거부 문제 등으로 파란을 거듭해 오던 정판사 위폐사건의 제4회 공판은 8월 27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제4호 법정에서 양(梁)판사 주심, 조(曺)검사 입회 밑에 개정되었다.지난번 공판에 이어 피고 김창선에 대한 심문을 시작하였는데 피고는 재판장의 질문에 두어마디 답변 하였을 뿐 함구로써 재판심리를 거부하였다.(재판장) 이때까지의 심리를 보건대 피고의 범죄행위는 뚜렷한 것이고 전번 공판에서의 피고의 답변거부는 피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변명이 없는 때문이라고 인정하는데 어떻게 생각하
공산당원 위폐사건의 피고 정판사 평판과장 김창선에 대한 속개공판은 8월 23일 오후 1시 30분부터 개정되었는데 재판장으로부터 피고에 대하여 이 사건은 “첫째로 증거와 증인이 뚜렷하고, 둘째로 법률의 제재 밑에 재판을 하게 되는 것이니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술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한 후 피고가 심문조서에서 사실을 부인한 조건을 지적하여 그 답변을 요구하였으나 피고 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재판장은 피고들의 부인 조항 중 김창선이가 위폐 제조하던 2월 1일 밤에 시내 아현정 척사대회에 참석하고 없었다는 것과 또
# 위폐사건 제2회 공판 재개정위폐사건 제2회 공판은 23일 오후 2시에 재개정하여 정판사 평판과장 김창선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먼저 재판장으로부터 피고에게 사실 심리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하라는 주의가 있은 후 사실 심문에 들어가려 할 때 피고 김창선이가 입고 있는 「피의 사쓰」 거기에 피로 쓰인 「일제잔재」 「악질경찰고문」의 샤쓰를 발견한 재판장은 재판정 경위를 시켜 벗겨 버린 후 소리를 질러 “신성한 법정에 나오는 피고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힐난한 후 드디어 심리를 시작하였는데 먼저 재판장
1946년 8월 6-7일 동아일보는 ‘좌익계의 긴급선전 선동방침’을 보도하였다. 신문기사를 읽어보자.「좌익계의 긴급선전 선동방침 알려지다.과연 전율할 일이었다. 저 정판사(精版社) 위폐사건이 어째서 허구한 사건이었던가? 다만 관계자의 전부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그들 좌익진영은 이번 위폐사건의 공판을 깨트려 없애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관계자가 좌든 우든 위폐사건은 독립 전야의 국민경제를 최대한도로 혼란시킨 범죄사상 큰 기록이다.그런데 보라! 소위 729캄파를 중심으로 한 ‘긴급선전선동방침(緊急宣傳 煽動方針)’이란 모종의 서류가 7월
# 1946년 8월 2일 오전 11시 한국민주당은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선전부(宣傳部) 담화로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1) 위폐사건 공판일에 작당하여 폭력으로써 법정을 점령하고 피고를 탈환하려 하고 시위와 가두연설을 하여 법의 권위를 모독하고 공안(公安)을 문란시키려 한 것은 천인공노할 중대 사건이다. 공산당원들이 아직도 위폐사건에 대한 책임을 감(感)치 못하고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려 할진대 공당(公黨)으로서의 죄악은 일층 심각하여 건국 역사상 할 수 없는 수치를 남길 것이다.1) 8·15 기념
1946년 8월 1일에 정판사사건 변호인 9명은 재판장 양원일에 대한 기피신청을 법원에 제출하였는데, 8월 2일에 양원일 판사는 다음과 같은 기피신청의 각하를 요망하는 의견서를 지방법원장에게 제출하였다.「양원일 재판장의 의견서피고인 박낙종 외 8명에 대한 통화위조행사 동(同) 위조미수봉조(僞造未遂幇助) 사건에 관하여 그 변호인 김용암(金龍巖) 외 8명으로부터 본 판사에 대하여 기피 신청이 있었으므로 형사소송법 제27조 제4항에 의하여 다음 의견을 개진함의견의 취지본건 기피신청을 각하함이 가(可)이유본건 기피의 원유(原油)로 변호인
1946년 7월 29일 서울지방법원 제14호 법정에서 주심 양원일(梁元一) 판사, 최영환(崔榮煥)·김정렬(金貞烈) 판사의 배석으로 제1회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공판이 열렸다. 새벽부터 정동 일대에서 수백 명의 공산당원들이 「항쟁가」를 부르며 소란을 피워 기마대를 비롯한 수백 명의 경관이 동원되었다. 공산당원들은 법원 구내에서 위폐사건 공판을 방해하는 시위행위를 격렬히 하였다. 이들은 돌 팔매질을 하는 등 소요를 일으켜 시위대 2명이 죽고, 47명이 체포되었다.사태 악화를 우려하여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청장 장택상 두 사람이 법정에 나
1946년 7월 24일에 사법부장(사법부 최고 책임자) 김병로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 언론재판 양상으로 흐르면서 왜곡보도가 극심하게 일어남을 경고하였다. 7월 25일자 「동아일보」를 읽어보자.“사법부장 김병로, 위폐사건 왜곡보도 경고조선공산당원들이 거액의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당비로 제공했다는 점이 세간에 가장 큰 관심을 자아내고 있던 조선공산당원 박난종 등 15명의 위조지폐사건은 드디어 오는 7월 29일 상오 9시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제1회 공판을 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일련의 단체에서는 제1회 공판을
1946년 7월 22일에 조선공산당은 하지에게 정판사위폐사건의 재판 공개 및 보도 자유 등을 요망하였다. 7월 23일의 「서울신문」을 읽어보자.“조공, 하지에게 정판사위폐사건의 재판 공개 및 보도 자유 등을 요망조공 중앙위원회에서는 29일 위조지폐사건으로 기소된 동 당원 박낙종 이하의 공판을 앞두고 22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청원서를 하지 장군에게 제출하였다고 한다.1) 현 담당검사 양인(兩人 조재천·김홍섭 검사)을 파면하고 가장 공명 정대한 인격자로서 검사를 새로 임명하며 이 신임 검사는 좌우 양익(兩翼)의 대표자 3인씩과 법조인
1946년 7월 19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조재천 검사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조선정판사에서 일어난 1천 2백만 원 위폐사건과 뚝섬위폐사건의 관계자 박낙종 김창선 등 12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공판청구서를 경성지방법원에 제출하였다. 이를 읽어보자(동아일보 1946년 7월 28일)“범죄사실제1) 조선정판사 관계(朝鮮精版社 關係)피고인 박낙종은 일찍이 일본 정치시대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의 처벌을 받은 일이 있고 서기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入黨)하였으며 동년 9월 상순 일본인 경영이던 경성부 중구 장곡천정(長
[오늘경제=박성현 기자]금융당국이 추진하고 있는 펫보험 비교·추천 서비스는 이달 중으로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기보험과 일반보험 등 상품 형태를 놓고 이견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화재인 경우 일반보험 형태로 출시·판매 중이며 그 외 현대·DB·메리츠·KB손보 등의 손보사는 장기보험 형식으로 출시하고 있다. 보장기간과 보험료, 특약에 따른 헤택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일반보험 기간이 끝난 후 다시 들거나 장기보험으로 갱신받는 것 모두 보험료율에선 차이가 없다"며 "하지만 상품 자체 차이를 어떻
3월 31일(일요일) 11시40분, 괴테하우스를 나와 뢰머광장으로 갔다. 고풍스런 골목길을 걷다 보니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파울교회가 나왔다. 교회 앞 벤치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제 슈퍼에서 산 빵과 소세지, 쥬스 등이다.이윽고 파울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교회 냄새가 안 난다. 대형 그림만 전시되어 있다.교회를 잠깐 보고 나오면서 내부 벽면에 있는 표시판을 찍었다. 거기에는 “독일의 외국계 은행들이 독일 국민의회(the German National Assembly) 150주년을 기념하여 이 교회를 재건하였다. 1998년 5월
1946년 7월 11일에 동아일보는 <해방후 최대의 범죄 공당원위폐사건(共黨員 僞幣事件) 1부 송국(送局)>이란 사설을 실었다. 사설을 읽어보자,1) 천하의 이목을 경동(驚動)하고 민중의 관심을 환기 공당원 위폐사건 (共黨員僞幣事件)은 1건 조서와 허다한 증거품과 함께 박낙종 이하 1당(黨) 12명이 9일 송국(送局)되어 사건은 일단락을 고하였다. 사건이 발생된 이래 수개월을 경과하는 동안에 수차의 공식 발표도 있었고 여러 곡절도 있었으나 본보(本報)는 일체 비판을 보류한채 일자(一字)의 평필(評筆)도 들지 않았었다.이 사건은 통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