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판사 위폐사건(21)-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조재천 검사 논고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오랫동안 공판을 거듭하여 오던 조선정판사 사건의 통화위조 동 행사(同 行使) 피의사건은 1946년 10월 22일에 결심(結審)되고 이어서 담당 검사인 조재천(曺在千) 검사는 장시간에 걸쳐 상세한 논고를 하였는데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제1. 사실 및 증거론

(1) 예심청구를 피하고 싶은 이상 여차 복잡하고 중대한 사건은 송국(送局)되기 전부터 검사가 경찰서에 출장하여 병행 조사하는 수밖에 방도가 없고 또 그것이 비교적 가장 타당하다.

(2) 경찰에서 60일 구속한 것은 군정하 이원적 법제하에서는 위법이 아니다.

(3) 경찰의 고문(拷問)에 의하여 피고인들이 입었다는 부위를 의학계 권위자에 감정시켰던 바 그것은 외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

(4) 피고인수 증인수 관계장부수 취조기관수가 많고 복잡한 인쇄기술을 포함하고 만천하의 주목을 모으고 있는 사건을 허구 날조한다는 것은 귀신도 불가능한 일이며 몽상조차 못 할 바이다.

(5) 뚝섬위조사건을 공산당에 둘러씌우는 모략이라는 소리도 있었던 바 뚝섬위조사건에도 공산당원이 2명이나 관련되었으며 위폐사건 진상조사단도 두개나 있다 하니 과연 그런 모략인지 아닌지는 진작 판명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6) 증거는 피고인께 불리한 것을 수집한 것이 아니고 전 피고인과 변호인이 반증을 제출하는 쪽쪽 증거조사를 하였는데 그 결과는 거의 전부가 도리어 피고인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7) 피고인 김창선은 체포된 익일(翌日)에 그 범행 일절을 체계적으로 또 상세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백하였던 바 설혹 어느 정도의 고문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적어도 그 과감성을 자타 공인하는 정당의 당원으로 상당한 의식과 투쟁성을 가진 당(當) 30년의 장년이 그 단기간의 고문에 못이겨 없는 사실을 허위 자백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8) 피고인 김창선이 수십 종류 위조권 중에서 자기들이 위조한 것이라고 적출(摘出)한 것은 조선은행 전문가의 감정과 증언에 의하여 사실 위조권이며 그 권(券)의 인쇄판이 조선정판사에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9) 피고인 김창선은 같이 있던 이영개(李英介)에게 위조사실을 실통정(實通情)한 일이 있다.

(10) 시종 일관하여 위조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여 왔으며 같이 있던 그 우인(友人) 배재룡(裵在龍)에게도 목도(目睹) 이야기를 한 증인 안순규(安舜奎)는 공판정에 이르러 목격 사실을 부인하여 위증의 혐의로 별도 취조 중이던 바 진술의 전후 모순이 사방에서 속출(續出)하고 전체를 총람하여 위증임이 명백하므로 처벌을 받았다. 동인(同人)은 과반 모정당원 2명의 협박을 받은 사실도 판명되어 있다.

(11) 본 사건은 그 중대성에 비추어 CIC군정청 미국인 경무부장도 각각 조사하였던 바 사실과 틀림없다는 심증을 얻었던 것이다.

(12) 경찰서에서 검사국에 송국된 후에도 피고인 중의 수명은 범죄사실을 의연 자백하였는데 공판에 와서는 부인하면서 ‘송국(送局)된 후이지만 부인하면 다시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고문할가 염려되어 허위 자백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송국(送局) 후 도로 경찰서로 보내서 고문하는 예는 절무(絶無)한 것이므로 피고인들은 송국(送局) 후도 아직까지 양심적으로 말하여 놓고 공판정에 와서야 죄를 면하려고 전술(前述)과 같은 궤변을 안출(案出)한 것이다.

(13) 피고인과 증인의 사법경찰관에 대한 다수회의 진술도 있고 또 경찰서 출장 조사시의 검사에 대한 다수회의 진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사하고 송국 후의 피고인들의 검사에 대한 자백 증인들의 진술 재판소에서 시행한 증인신문 감정 검증의 결과 압수 증거품만으로도 본건(本件) 범죄사실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14) 공판에 와서 피고 전부가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범죄 심리학상의 피고인의 부인성의 발현(發顯)이다. 더욱이 7월 29일 제1회 공판 소동일(騷動日)의 외부에서의 선동과 소위 피고 회담이라는 것에서 피고인 박낙종은 전원 보조를 일치하자고 제언하고 동(同) 김창선은 나 혼자 이 사건을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라고 서약한 것은 이 피고인의 부인성(否認性)을 120퍼센트까지 발현시킨 것이다.

(15) 피고인들은 그간 반증이라고 하여 부재증명(不在證明) 기술상 인쇄불능사유 자재난 원판상이(原版相異) 인쇄장애에 관한 무려 40항목을 제출하였으나 허다한 증인 감정인의 신문 결과 검증의 결과 압수된 장부 서류의 기재 기타 압수품에 의하여 그 제출된 반증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피고인 송언필의 부재증명을 한 이균(李鈞)은 타증인의 증언에 의하여 누구를 받자 곧 위증한 것을 자백하고 유죄판결에 대한 상소권을 포기하고 벌써 복역하고 있다.

(16) 해방 직후 일본인들은 근택인쇄소(近澤印刷所)에서 은행권을 다액 인쇄한 일이 있었는데 피고인들은 일면 그 인쇄소를 인수하여 기계 기술 자재 기타 일절 필요품을 가지고 있었고 타면(他面) 피고인들의 소위 또는 지지하는 정당의 재정이 곤란하였던 관계로 은행권 위조에까지 가장 자연스럽게 진전한 것이다.

제2. 범죄론

피고인 중에는 과거에 조선해방을 위하여 다년 투쟁해 온 사람도 있어 그 점 대단히 통석(通惜)되는 바이다. 그러나 통화는 극도로 팽창하고 물가는 천정부지(天井不知)로 등귀하여 국민 생활과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는데 거액의 통화를 위조 행사하여 그렇지 않아도 혼란 상태의 건국 도상의 경제질서를 교란하는 범죄가 가장 악질이라는 것은 피고인 자신들도 인식하고 있는 바이므로 중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동아일보 1946년 10월 22일)

(참고자료)

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한국현대사료 DB, 자료 대한민국사 제3권 1946년 10월

저작권자 © 오늘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